한기용 교수, San Jose Sate University

창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요즘 자주 느껴지는 불안이 하나 있다. 온라인에서 돌아가는 서비스인데 아직 분명한 해자나 유통망이 없는 경우, 많은 창업자들이 마음 한구석에 비슷한 걱정을 품고 있다.

“언젠가 거대언어모델(LLM)이 내 서비스를 잡아먹는 것 아닐까?”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LLM 중력(LLM Gravity)”라는 표현을 들었다. 말 그대로 주요 AI 기업들이 주변의 개발자 도구, 인프라, 생산성 소프트웨어 영역까지 빨아들이는 시장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존에는 독립된 제품이나 회사로 존재하던 기능들이 점점 거대한 LLM 플랫폼 안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스타트업을 위협하는 블랙홀, ‘LLM 중력’의 시대


스타트업 입장에서 이 표현은 단순한 시장 트렌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내가 만들고 있는 사업이 과연 독립적인 회사로 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명확한 해자가 없는 서비스라면 이 불안은 더 커진다. 기능 자체가 핵심인 서비스일수록, 사용자가 굳이 별도의 제품으로 써야 할 이유가 약할수록, LLM 중력권 안으로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오늘은 독립 서비스처럼 보이지만, 내일은 ChatGPT나 Claude, Gemini의 기능 하나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 창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가능하면 LLM 중력권 바깥에 있는 주제를 잡는 것이 좋다.”

여기서 말하는 바깥은 AI와 무관한 영역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AI를 적극적으로 쓰되, AI 모델 회사들이 쉽게 직접 들어오기 어려운 영역을 말한다. 예를 들면 규제가 강하거나, 오프라인 운영이 엮여 있거나, 특정 산업의 복잡한 워크플로우를 깊이 이해해야 하거나, 기존 고객 관계와 유통망이 중요한 영역이다. 이런 시장은 스케일이 느릴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느림과 복잡함이 살아남는 힘이 되기도 한다.

다만 LLM 중력권 안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이미 고객 접점을 갖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고객군을 알고 있고, 그들에게 제품을 팔 수 있는 채널이 있으며, 실제 문제를 반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LLM은 위협이 아니라 레버리지가 될 수 있다. LLM을 활용해 비용을 줄이고, 기존 제품의 기능을 수평적으로 확장하고, 더 적은 인력으로 더 넓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직접 만들 순 없다: AI 시대가 다시 던지는 "Buy or Build"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은 AI 기업들도 결국 모든 것을 직접 만들고 운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혼란기라 많은 회사가 바이브 코딩과 내부 AI 도구를 이용해 무엇이든 직접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업들은 다시 익숙한 질문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이건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서 쓰는 편이 나은가?”

특히 소프트웨어가 단순 기능을 넘어 운영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답은 더 복잡해진다. 고객 지원, 영업, 결제, 정산, 규제 대응, 현장 운영, 데이터 관리처럼 실제 업무와 깊게 엮인 문제는 기능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스타트업의 기회가 다시 생긴다. 단순 기능은 흡수될 수 있지만, 특정 고객군의 문제를 끝까지 책임지는 운영형 제품은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

오히려 LLM 중력권은 경쟁자를 줄여주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 막연히 기능 몇 개를 조합해 서비스를 만들던 회사들과 겁먹고 다른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경쟁사들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고객을 깊이 이해하고, 유통망을 갖고 있으며, 오래 버틸 의지가 있는 회사라면 중력권 안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은 위치에 설 수도 있다. 같은 기능을 더 싸게 만들 수 있고, 더 빠르게 확장할 수 있으며, 경쟁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물러난 시장을 차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LLM 중력권의 생존 방정식: 독점적 운영 능력과 긴 호흡


결국 질문은 “내 사업이 LLM 중력권 안에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안에서 살아남을 이유가 있는가"이다. 기능만으로 존재하는 서비스라면 위험하다. 사용자가 굳이 독립 제품으로 써야 할 이유가 없다면 더 위험하다. 하지만 고객 접점, 유통망, 데이터, 운영 능력, 산업 이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 LLM 중력권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능만으로는 부족하다. 고객을 만나는 능력, 문제를 끝까지 책임지는 운영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버틸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있다면 AI의 발전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PMF(Product Market Fit)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창업자가 자신에게 맞는 시장과 문제를 고르는 일, 즉 Founder Market Fit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무엇을 하든 결국 긴 호흡으로 오래 할 생각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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