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미국 소비시장에서 제품은 대부분 하나의 패키지 형태로 판매됐다. 항공권에는 위탁수하물과 좌석 선택이 포함됐고, 호텔 숙박료에는 조식과 편의시설 이용이 함께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 역시 대부분의 편의사양이 일정 등급별로 묶여 판매됐으며, 소프트웨어 서비스도 하나의 월 구독료만 지불하면 대부분의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기업들의 가격 전략은 이러한 '번들(Bundle)' 방식에서 점차 '언번들링(Unbundling)'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 언번들링은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여러 개의 개별 요소로 분리한 뒤 소비자가 필요한 기능만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레스토랑에서 메인 메뉴와 사이드 메뉴를 각각 선택하는 '아라카르트(à la carte)' 주문 방식과 유사하다고 하여 '아라카르트 경제(A La Carte Economy)'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기본 가격을 낮게 제시함으로써 소비자의 구매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으며, 이후 소비자가 필요한 옵션을 추가 구매하도록 유도해 객단가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소비자는 자신이 실제로 사용하는 기능에 대해서만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소비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구조는 최근 몇 년간 지속된 인플레이션으로 가격에 더욱 민감해진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과도 맞물리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와 유통업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가격 인상이 아닌 '가격 구조의 재설계(Price Architecture)'로 해석하고 있다. 기업들은 제품 가격을 올리는 대신 상품 구성을 세분화하여 소비자마다 서로 다른 가격을 지불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AI와 소비자 데이터 분석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전략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 있다.
항공업계에서 시작된 가격 혁신, 프리미엄 시장까지 확대
미국 항공업계는 아라카르트 가격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 산업 가운데 하나다. 2000년대 후반 저비용항공사(Low Cost Carrier)를 중심으로 위탁수하물, 좌석 지정, 기내식 등을 별도 요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러한 방식은 대형 항공사들까지 확산됐다.
최근에는 이러한 전략이 이코노미 클래스뿐 아니라 프리미엄 객실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주요 항공사인 Delta Air Lines는 최근 'Basic Business' 상품 도입을 추진하며 프리미엄 좌석에도 아라카르트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기존 비즈니스 클래스와 동일한 좌석을 제공하면서도 라운지 이용, 환불 및 변경 조건, 좌석 선택, 마일리지 적립 등 일부 서비스를 제외하는 대신 더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델타 항공 비즈니스 석 상품>

[자료: Delta]
이는 기존에는 프리미엄 좌석을 구매하는 고객이라면 자연스럽게 포함된다고 여겨졌던 서비스들까지 선택형 옵션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소비자는 동일한 좌석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를 제외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항공사는 다양한 가격대를 구성해 더 많은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Delta뿐만 아니라 United Airlines, American Airlines 등 미국 주요 항공사들도 Basic Economy 이후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유사한 가격 세분화를 확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대부분의 항공 서비스가 좌석 자체보다 '서비스 옵션' 중심으로 경쟁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항공산업만의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 기업들이 전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새로운 가격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구독 서비스에서 자동차까지
항공업계에서 시작된 아라카르트 가격 전략은 이제 미국 소비시장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최근 기업들은 동일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모든 소비자에게 동일한 가격으로 판매하기보다, 기본 상품의 가격을 낮춘 뒤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과 서비스를 개별적으로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가격 체계를 재편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동시에 기업의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전략으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산업에서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온라인 구독 서비스 시장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월 구독료만 지불하면 대부분의 기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광고 포함 요금제와 광고 없는 프리미엄 요금제, 가족 요금제, 학생 요금제 등 다양한 선택지가 제공되고 있다. 일부 플랫폼은 스포츠 중계나 프리미엄 콘텐츠를 별도의 유료 옵션으로 판매하며,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에 따라 최종 구독료가 달라지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자동차 산업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일부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운전자 보조 기능, 커넥티드 서비스, 프리미엄 내비게이션, 원격 제어 기능 등을 차량 구매 후에도 구독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과거에는 상위 트림에만 포함되던 기능들이 이제는 필요에 따라 추가 구매하는 옵션으로 바뀌면서 자동차 역시 지속적인 서비스 수익을 창출하는 플랫폼으로 변화하고 있다.
<테슬라 추가 구독 서비스 옵션>

[자료: Tesla]
여행과 외식…유통업계도 '선택형 소비' 확대
호텔과 여행 산업에서도 아라카르트 가격 전략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숙박료에 포함되던 조식, 주차 서비스, 객실 업그레이드, 얼리 체크인 및 레이트 체크아웃 등이 개별 옵션으로 판매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외식 산업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패스트푸드와 패스트 캐주얼 레스토랑에서는 기본 메뉴를 저렴하게 제시한 뒤 치즈, 아보카도, 단백질 추가, 음료 업그레이드 등을 개별 옵션으로 판매하고 있다. 커피 전문점에서도 우유 종류, 시럽, 에스프레소 샷 추가 등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며 소비자 맞춤형 주문이 일상화되고 있다.
소매유통 분야에서는 제품 구매 시 연장 보증 서비스, 설치 서비스, 배송 옵션 등을 별도로 선택할 수 있는 구조가 일반화되고 있다. 또한 일부 유통업체들은 멤버십 가입 고객에게만 할인 가격을 제공하는 '회원 전용 가격(Member Pricing)' 전략을 확대하며 가격 체계를 더욱 세분화하고 있다.
AI가 만드는 가격 전략
아라카르트 경제가 빠르게 확산되는 배경에는 AI와 데이터 분석 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들은 소비자의 구매 이력, 검색 기록, 이용 빈도 등을 분석해 어떤 옵션을 제안할지 결정하고 있으며, 소비자마다 서로 다른 상품 구성과 추가 서비스를 추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제품 구매 시 연장 보증이나 액세서리를 추천하고, 항공권 예약 사이트에서는 좌석 업그레이드와 수하물 추가 서비스를 제안한다. 스트리밍 플랫폼은 이용 패턴을 분석해 광고 없는 요금제나 가족 요금제로 업그레이드를 유도하며, 호텔 예약 플랫폼도 객실 업그레이드나 조식 패키지를 개인별로 추천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가격 전략에 대한 소비자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필요한 서비스만 구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과거에는 기본으로 제공되던 서비스까지 유료 옵션으로 전환되면서 실제 지불 금액이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AI 기술이 발전할수록 소비자별 맞춤형 가격 전략과 옵션 판매는 더욱 정교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아라카르트 경제는 미국 소비시장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망 및 시사점
미국 소비시장의 아라카르트 경제는 단순한 가격 전략을 넘어 기업의 수익 구조와 소비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고물가와 소비 둔화가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소비자의 가격 부담을 낮추기 위해 기본 상품의 가격은 최대한 유지하거나 인상 폭을 최소화하는 대신, 부가 기능과 서비스를 선택형 옵션으로 분리해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KOTRA 로스앤젤레스 무역관이 인터뷰한 현지 유통업계 관계자는 "미국 소비자들은 가격에 민감해졌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기능에는 추가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과거보다 낮아지고 있다” 라고 전망했다. 여기에 AI와 데이터 분석 기술이 결합되면서 소비자의 구매 성향에 맞춘 맞춤형 옵션 제안이 가능해졌고, 앞으로도 다양한 산업에서 상품 구성과 가격 체계는 더욱 세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기업들도 미국 시장 진출 시 단순히 제품 가격 경쟁력만을 고려하기보다, 소비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과 서비스 구성을 함께 설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제품은 기본 모델과 프리미엄 기능을 분리하거나, 스마트 기기는 소프트웨어 서비스와 구독형 기능을 결합하는 방식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설치 서비스, 유지보수, 멤버십, 연장 보증과 같은 부가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면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는 동시에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료: The Wall Street Journal, Deloitte, Statista, Delta, Tesla, PwC, KOTRA 로스앤젤레스 무역관 자료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