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약 40년 만에 원자력 발전 재도입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탈리아 상원은 9월 23일 ‘지속가능 원자력 정부위임법(Ddl Delega Nucleare)’을 찬성 81표, 반대 51표, 기권 7표로 최종 가결했다. 앞서 하원은 6월 4일 찬성 155표, 반대 86표, 기권 8표로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상원이 하원안을 수정 없이 승인하면서 의회 절차가 마무리됐다.
이탈리아는 1987년 국민투표 이후 기존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도 당시 정부의 원전 재도입 관련 법 조항이 폐지된 바 있다.
이번 법안은 특정 원전의 즉각적인 건설이나 특정 원자로 기술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신규 원전을 도입할 수 있도록 법률·규제체계를 다시 마련하기 위한 정부 위임법이다. 정부는 법률 발효 후 12개월 이내 원전 건설·운영, 핵연료 및 방사성폐기물 관리, 안전·감독체계 등에 관한 시행입법을 마련해야 하며, 이후 24개월간 보완·수정할 수 있다. 피케토 프라틴 환경에너지안보부 장관은 이 법이 민수용 원자력만을 대상으로 하며 군사적 목적의 활용은 배제된다고 밝혔다.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법안 통과 후 주변국에서 원전으로 생산된 전력을 수입하면서도 자국에서는 원자력 발전을 하지 못해온 상황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피케토 프라틴 장관도 후속 시행입법 마련을 신속히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적으로는 기술중립, 정책 초점은 소형·차세대 원자로
이번 법안은 특정 원자로 형식을 사전에 지정하지 않는 ‘기술중립’ 원칙을 채택했다. 법안은 모듈형·첨단 기술을 포함한 ‘최적 가용 기술(migliori tecnologie disponibili)’을 활용해 원자력 발전을 규율하도록 하고 있으며, 안전 측면에서는 IAEA 등 국제 기준을 준수하도록 했다.
법안은 기존 원자력 시설의 해체·폐로를 위임 범위에 포함하는 한편, 신규 도입 원자로는 특정 유형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형 원자로 역시 법문상 일률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정부와 의회의 논의 및 산업계의 준비 상황을 감안하면 정책의 무게중심은 기존 대형 원전보다 SMR(소형모듈원자로), AMR(선진모듈원자로) 등 소형·차세대 모듈형 원자로에 놓여 있다. 법안 역시 모듈형·첨단 원자력 기술의 활용과 함께 가능한 경우 이탈리아 및 유럽 공급망을 육성·활용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핵융합은 보다 장기적인 연구·개발 및 활용 대상으로 포함됐다.
정부는 향후 ‘지속가능 원자력 및 핵융합 국가 프로그램’을 수립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신규 원자력 설비의 실증·입지·건설·운영부터 기존 시설 해체, 핵연료 관리, 방사성폐기물 및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최종처분까지 관련 제도를 종합적으로 정비한다.
원전 건설지역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향후 기술·환경 기준 등을 토대로 입지를 정하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 등을 진행하게 된다. 인허가 측면에서는 환경에너지안보부가 원전 건설·운영에 필요한 각종 인허가를 통합하는 절차를 주관할 예정이다.
상업 원전 건설비는 아직 미정, 산업 생태계 조성부터 착수
이번 법안 통과가 곧바로 대규모 원전 건설 발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상업 원전 건설을 위한 전체 사업비나 구체적인 금융지원체계는 확정되지 않았다. 법에는 위임법 이행 관련 투자재원으로 환경에너지안보부에 2027~2029년 매년 2,000만 유로, 총 6,000만 유로를 배정하고 대국민 정보 제공 등에 별도 재원을 투입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탈리아 산업계는 원전 재도입에 대비해 공급망 구축 준비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움직임은 2025년 5월 설립된 ‘누클리탈리아(Nuclitalia)’다. 이탈리아 주요 에너지·산업기업인 Enel, Ansaldo Energia, Leonardo가 각각 51%, 39%, 10%를 출자했다. 초기에는 수냉식 SMR을 중심으로 기술·경제성을 평가하고 산업 파트너십과 공동설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누클리탈리아가 초기 단계부터 이탈리아 산업 공급망의 역량 활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향후 원자로 기술이 구체화될 경우 원자로 핵심기기뿐 아니라 소재·부품, 보조계통, 전력기기, 디지털 제어, 안전설비, 엔지니어링 등으로 관련 공급망 논의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2030년대 중반 첫 원전 목표, 인허가·부지·사회적 수용성이 일정 좌우
이탈리아 정부는 원전 재도입의 배경으로 에너지 안보와 탈탄소화, 향후 전력수요 증가에 대한 대응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에너지기후계획(PNIEC)은 2035년부터 차세대 원전 도입을 가정하고 있다. 보수적 시나리오에서는 2050년 약 8GW의 원전 설비로 전력수요의 약 11%를 공급하고, 전체 기술적 잠재력을 활용할 경우 약 16GW·22%까지 확대 가능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피케토 프라틴 장관은 첫 원전의 전력 생산 가능 시점을 대체로 2033~2035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업계·기술진의 분석을 토대로 2033~2034년을 언급하면서도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가능한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장관은 향후 시행입법을 통해 인허가 절차와 원자력 안전·감독기관의 운영 모델 등을 우선 확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행입법 마련 이후에도 기술 선정, 부지 확정, 환경영향평가, 인허가, 설계·건설 및 시험운전 등의 절차가 남아 있다. 따라서 실제 가동 시점은 제도 설계와 사업 추진 속도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정치·사회적 변수도 적지 않다. 원전 부지 선정 과정에서는 지자체 및 주민과의 협의와 지역사회 수용성 확보가 필요하며, 야당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상원 심의 과정에서는 오성운동(M5S), 녹색좌파동맹(AVS), 민주당(PD) 등 야당이 위헌 소지를 이유로 법안 심의 중단을 요구했으나, 찬성 52표, 반대 89표로 부결됐다. 향후 시행입법과 개별 원전 부지 선정 과정에서도 관련 정치·법적 논쟁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피케토 프라틴 장관은 2026년 6월 원전 문제에 관한 새로운 국민투표가 2028년 또는 2029년에 실시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향후 국민여론과 정치 일정도 중장기 원전 사업 추진 속도의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시사점
이번 법안 통과로 이탈리아 원전 시장이 즉시 대규모 발주 단계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차세대 원자력 산업 생태계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출발점이 마련됐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산업계의 관심이 SMR·AMR 등 차세대 모듈형 원자로에 집중되고 있는 만큼 향후 원자로 핵심기기뿐 아니라 펌프·밸브·열교환기 등 보조계통, 특수 소재·부품, 전력기기, 디지털 계측제어(I&C), 안전설비, 엔지니어링 및 유지보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급망 구축 논의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법안이 이탈리아 및 유럽 원자력 공급망 육성을 정책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는 만큼, 한국기업은 완제품이나 기자재의 단순 수출보다 현지 기업과의 공동개발·기술협력, 합작투자, 유럽 공급망 편입 등을 통한 시장 진입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 단계는 개별 원전 발주보다는 기술 선정·제도 설계·산업 파트너십 형성 단계에 가깝다. 따라서 누클리탈리아를 비롯한 주요 에너지·엔지니어링 기업의 기술평가와 파트너 선정 동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향후 시행입법에서 구체화될 인허가·산업지원·조달 기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료: 이탈리아 상원(Senato della Repubblica), 이탈리아 환경에너지안보부(MASE), ANSA, Sky TG24, Il Sole 24 Ore, Enel, KOTRA 밀라노무역관 자료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