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진 외국변호사(러시아), KL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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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손해배상청구는 크게 1) 계약위반(채무불이행) 등 계약책임을 묻는 경우와 2) 위법행위로 타인의 권리나 법익을 침해한 데 따른 불법행위책임을 묻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하나의 사실관계가 채무불이행과 불법행위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 두 손해배상청구권이 함께 성립하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행사할 수 있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계약관계를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특별한 법률관계로 보고, 이를 규율하는 계약법을 일반적인 권리침해에 적용되는 불법행위법보다 우선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손해가 채무불이행에서 발생한 경우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불법행위의 요건까지 충족하더라도 채무불이행의 문제로 보아 계약책임을 묻는다.
그렇다면 러시아 소송에서 원고가 계약관계를 숨긴 채 채무불이행에 해당하는 사실관계를 불법행위로 구성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어떻게 될까?
2. 러시아 법원의 태도
우선, 러시아에서 소를 어떻게 특정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에서는 소를 1) 원고가 피고에게 구하는 구체적인 청구(предмет иска)와 2) 그 근거가 되는 사실관계인 청구원인(основание иска)으로 특정한다. 원고가 소장에 기재하는 적용법규는 소를 특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따라서 동일한 사실관계에 대하여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 중 어느 법리를 적용할 것인지는 법원이 판단하는 ‘소의 법적성질 결정(правовая квалификация иска)’의 문제다.
러시아 법원은 ‘법은 법원이 안다(iura novit curia)’는 법언에 따라 원·피고가 주장·증명한 사실관계의 범위에서 법률관계의 성질과 적용법규를 독자적으로 판단한다.
3. 사례를 통한 검토
1) 사안
한국 기업이 러시아 물류기업(상대방)과 임치계약을 체결하고 물품을 상대방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상대방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물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의무를 부담하고, 임치계약에는 상대방의 손해배상책임을 1억원으로 제한하는 책임제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러시아법을 준거법으로 하고, 러시아 법원을 전속적 합의관할로 정하였다.
그런데 상대방의 과실로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여 보관 중이던 한국 기업의 물품이 멸실되었다. 멸실된 물품의 시가는 2억원이지만, 계약상 손해배상책임의 상한은 1억원이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은 (본인에게 불리한) 계약상 손해배상책임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하여, (본인에게 유리한) 불법행위책임을 주장하고, 멸실된 물품의 시가인 2억원 전액의 손해배상을 러시아법상 청구할 수 있을까?
2) 검토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그러나 상대방이 계약상 보관의무를 위반하여 물품이 멸실되었다면 이는 전적으로 채무불이행에 해당한다. 한국 기업이 이를 불법행위로 구성을 달리하더라도 손해가 임치계약상 보관의무 위반에서 발생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임치계약서 등을 제출하여 당사자 사이의 계약관계를 주장·증명하면, 러시아 법원은 이를 토대로 손해배상청구의 법적 성질을 들여다볼 것이다. 이때 물품의 멸실이 계약상 보관의무 위반에서 발생하였다고 판단하면, 설령 불법행위의 요건 역시 충족하더라도 계약법을 적용하여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의 범위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사안에서 한국 기업이 불법행위책임을 주장하여 2억원 전액을 배상받기는 어렵고, 계약책임으로서 손해배상책임액의 상한인 1억원의 범위 내에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청구원인을 이루는 사실관계가 불법행위의 요건도, 채무불이행의 요건도 충족하지 못하면 손해배상청구는 기각된다. 해당 기각판결이 확정되면 동일한 당사자 사이에서 동일한 사실관계에 기초한 손해배상청구를 논리구성만 달리하여 다시 제기하기는 어렵다.
4. 결어
이처럼 러시아 손해배상소송에서 법원은 소송에서 드러난 사실관계를 토대로 법률관계의 성질과 적용법규를 독자적으로 판단한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손해가 계약상 채무불이행에서 발생한 경우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 중 하나를 선택하여 물을 수 없고, 계약책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원칙임을 확인하였다.
결론은 분명하다. 러시아 기업과 거래할 때에는 최초에 계약서를 잘 작성해야 한다. 손해배상의 범위, 채무이행의 담보, 위약금, 계약해제사유, 준거법, 분쟁해결 방법 등 필요한 안전장치를 처음부터 계약서에 촘촘히 마련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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