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반도체 자립 기조와 이탈리아의 대응
반도체 공급망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유럽연합(EU)은 역내 생산능력 확대와 대외의존도 완화를 목표로 반도체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3년 발효된 유럽연합 반도체법(EU Chips Act)에 이어, 집행위원회는 2026년 6월 3일 지원 범위를 소재·제조·설계·패키징 등 가치사슬 전반으로 확대하는 반도체법 2.0(Chips Act 2.0) 규정안을 제안했다. 개정안은 인허가 절차 간소화, 수요 측면 지원 도입, 유럽 내 최초 도입 설비(First-of-a-Kind) 지원 확대 등을 골자로 하며, 현재 이사회·유럽의회와의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탈리아 정부도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설정하고, 총 32억 9,200만 유로 규모의 국가 미세전자 기금(Fondo nazionale per la microelettronica) 조성, 실리콘카바이드(SiC)·첨단 패키징 분야 투자유치, 유럽공동관심중요프로젝트(IPCEI) 참여를 통한 연구개발(R&D)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는 전력·아날로그 반도체와 실리콘 웨이퍼 분야에서 기존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어, 유럽연합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용도·공정별로 분산된 전문 거점 생태계
이탈리아 반도체 생태계는 하나의 대형 종합 허브가 아니라, 용도와 공정별로 분산된 전문 거점들로 구성된 것이 구조적 특징이다. 북부 아그라테브리안차(Agrate Brianza)는 STMicroelectronics(이하 ST)의 300mm 아날로그·전력 반도체 중심지이며, 노바라(Novara)와 메라노(Merano)는 MEMC·GlobalWafers의 실리콘 웨이퍼 거점으로 2025년 10월 300mm 신공장 'FAB300'이 준공됐다. 남부 시칠리아의 카타니아(Catania)는 ST의 실리콘카바이드·와이드밴드갭(WBG) 전력반도체 거점이자, 국가연구위원회 산하 미세전자·마이크로시스템 연구소(CNR-IMM) 본부와 맞물린 연구·산업 축이다. 중부 아베차노(Avezzano)에 위치한 LFoundry사의 200mm 특화 위탁생산 공장은 주력 고객사 이탈로 생산이 급감하며 위기 국면에 진입했다. 이 밖에 노바라에는 싱가포르 기업 Silicon Box의 첨단 패키징·시험 투자가 추진돼 2026년 3월 개발협약이 체결됐으나, 인허가 절차가 진행 중으로 아직 착공 전이다.
<이탈리아 반도체 주요 거점 지도>

[자료: 기업 홈페이지, KOTRA 밀라노 무역관 재구성]
주요 프로젝트별 진행 현황
① STMicroelectronics(이탈리아 최대 앵커 기업)
2026년 7월 28일 이탈리아 기업·메이드인이탈리아부(MIMIT)에서 열린 노사정 회의에서 ST는 자국 사업장(카타니아·아그라테)을 대상으로 2034년까지 총 120억 유로 규모의 신규 산업계획을 제시했다. 다만 이 계획은 이사회의 최종 재정 승인을 전제로 하며, 세부 시기와 재원, 고용 조건을 담은 기본협약은 2026년 9월 체결을 목표로 협의가 진행 중이다. 노조 측에 따르면 전환 완료 시 이탈리아 내 총 1만 2,700명의 고용 유지가 목표다.
아그라테–카스텔레토(Castelletto) 사업장은 2034년을 목표로 한 300mm(12인치) 전환·증설 계획을 담고 있다. 투자 규모는 2025~2027년 15억 달러(확정)와 2028~2034년 28억 달러(조건부)로 제시됐으며, 300mm 생산능력은 주당 4,000장 목표를 당초보다 앞당겨 추진한 뒤 2028년 8,000장, 2034년 1만 4,000장으로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카타니아의 실리콘카바이드 캠퍼스(Silicon Carbide Campus)는 총투자 약 50억 유로(이 중 이탈리아 정부 지원 약 20억 유로) 규모로, 기판 제조부터 200mm 전력소자·모듈 생산, 시험·패키징까지 한 부지에 수직 계열화하는 통합 SiC 거점이다. 2024년 최초 발표 당시에는 2026년 생산 개시와 2033년 완전가동(최대 주당 1만5,000장)을 목표로 했으나, 이후 투자 일정이 조정돼 현재는 1단계 주당 5,000장 생산능력을 2028년 말까지 확보하고, 자동차 전동화 등 시장 상황에 연계된 후속 증설을 거쳐 최대 주당 1만5,000장 규모의 완전가동 시점을 2034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② MEMC(GlobalWafers)
대만 GlobalWafers(세계 웨이퍼 시장 약 18%, 3위권)의 이탈리아 법인으로, 메라노 공장에서 생산한 실리콘 잉곳을 노바라 공장에서 가공해 연마·에피택셜 웨이퍼를 생산한다. 노바라 공장의 기존 200mm 라인에 더해 약 4억5,000만 유로를 투자해 300mm 웨이퍼 생산시설 FAB300을 신설했으며, 이 중 유럽공동관심중요프로젝트 미세전자·통신기술(IPCEI ME/CT)을 통해 약 1억300만 유로의 R&D 지원을 받았다. FAB300은 2025년 6월 첫 300mm 샘플 웨이퍼를 생산·출하하고 고객 인증을 진행한 뒤, 같은 해 10월 공식 준공됐다. 2026년 8월 현재 FAB300은 초기 고객 인증과 생산능력 램프업 단계에 있으며, GlobalWafers는 고객별 qualification 진척과 시장 수요에 맞춰 생산능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완전 가동 시 로직·메모리·전력·MEMS/센서용 300mm 연마·에피택셜 웨이퍼를 자동화 라인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③ LFoundry
200mm 기반 시모스(CMOS)·특수공정 위탁생산을 담당해 온 독립계 공장(약 1,200명 규모)이다. 소유구조는 미국 Micron 매각 이후 중국 SMIC(2016년 진입·2019년 이탈)를 거쳐, 현재 홍콩 소재 SPARC Semiconductor HK가 70%, 장쑤성 우시(Wuxi) 소재 Wuxi Xichanweixin Semiconductor가 30%를 보유한 구조다(양사 모두 중국계). 장기 주력 고객이던 ON Semiconductor 물량이 2024년 말 대폭 축소된 이후 가동률이 급락해, 2026년 6월 기준 생산이 정상 대비 약 20% 수준(사실상 생산 중단에 근접)까지 떨어졌다. 2026년 5월 말에는 최고경영자와 연구개발 부서장이 함께 해임되며 경영진 공백에 놓였고, 고용유지 지원제도(cassa integrazione)가 2026년 12월 31일 만료 예정이어서 공장 폐쇄 위험까지 거론되고 있다.
④ Silicon Box(미착공)
싱가포르 소재 칩렛 집적·첨단 패키징·시험 전문기업으로, 총투자 32억 유로에 이탈리아 측 지원은 최대 13억 유로다(2024년 12월 EU 집행위 국가보조 승인, EU 역내 최초 유형(first-of-a-kind) 시설로 인정). 2026년 3월 31일 기업·메이드인이탈리아부(MIMIT), 투자 인센티브 집행기관 Invitalia, Silicon Box 간 개발협약이 체결됐으며, 현재 정부 심사 및 관련 인허가 절차가 진행 중인 착공 전 단계다. 회사는 생산 개시 목표를 2028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공급망 구조와 현지 장비·부품 기업
이탈리아 반도체 공급망은 실리콘 웨이퍼 → 전력·아날로그 반도체 전공정 → 후공정·시험 → 유럽 제조기업 및 글로벌 완성품 업체(OEM)로 이어지지만, 단계별 역량은 균등하지 않다. 메라노·노바라의 실리콘 웨이퍼와 아그라테·카타니아의 전력·아날로그 반도체 생산 등 상류와 전공정에 상대적으로 강점이 집중된 반면, 첨단 패키징을 비롯한 후공정 기반은 제한적인 비대칭적 구조를 보인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웨이퍼와 반도체는 자국 최종 소비시장보다 유럽 역내 제조업체와 글로벌 OEM 공급망을 통해 수요가 흡수되는 비중이 높다.
최근에는 이러한 구조에도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노바라 FAB300의 생산능력 확대와 아그라테의 300mm 전환, 카타니아의 SiC 생산기반 확충으로 상류·전공정 역량이 강화되는 반면, LFoundry의 생산 위축으로 독립계 200mm 파운드리의 역할은 축소되고 있다. 후공정에서는 첨단 패키징 역량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Silicon Box의 노바라 투자가 추진되고 있으나 아직 착공 전 단계로, 단기적으로 기존 공급망 구조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조달은 일반 산업재 시장과 다른 특성을 보인다. 석영, 개스킷, 밸브, 진공부품, 고순도 폴리머 등 공정 관련 품목은 주요 생산기업과 장비업체의 승인 공급업체망과 기술검증(qualification) 절차를 통해 조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현지 유통망이나 대리점 확보만으로 신규 납품이 이뤄지기보다는 개별 생산라인과 장비에 대한 품질·기술 검증 및 공급업체 승인이 중요한 시장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현지 장비산업은 노광·식각·증착 등 대형 전공정 장비보다는 시험·계측·자동화 분야에 상대적으로 특화돼 있다. 웨이퍼 검사용 프로브카드 분야의 Technoprobe를 비롯해 SPEA·Seica·OSAI 등 반도체·전력전자 시험장비 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이탈리아 반도체 장비·부품 주요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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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명 |
분야 |
소재지 |
홈페이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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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probe |
웨이퍼 시험용 프로브카드, 시험 인터페이스 |
체르누스코 롬바르도네(롬바르디아주) |
www.technoprobe.com |
세계 2위 프로브카드 기업, 밀라노 증시 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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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A |
반도체 자동시험장비, 웨이퍼·집적회로·센서·전력반도체 시험 |
볼피아노(피에몬테주) |
www.spea.com |
MEMS·센서 시험 분야 글로벌 선도 자동시험장비 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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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ca |
인쇄회로기판·전자모듈 자동시험장비, 전력반도체 시험 |
스트람비노(피에몬테주) |
www.seica.com |
자동시험장비 글로벌 공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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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AI Automation System |
센서·전력소자 시험, 전력모듈 조립·번인 자동화 |
파렐라(피에몬테주) |
osai-as.com |
밀라노 증시(Euronext Growth Milan) 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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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s |
반도체 신뢰성 시험, 번인, 시험 시스템·고장 분석 |
토디(움브리아주)) |
www.eles.com |
밀라노 증시(Euronext Growth Milan) 상장 |
[자료: 각 기업 홈페이지, KOTRA 밀라노 무역관 재구성]
정책 동향: 국내 거버넌스·재원 확대와 전략분야 집중 육성
이탈리아의 반도체 정책은 앞서 언급한 EU Chips Act 기조를 기반으로 생산능력 확대, 전략적 대외의존도 완화, 공급망 위기 대응체계 구축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Chips Act 2.0 개정안은 범용·산업용 반도체를 함께 육성하고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한편, First-of-a-Kind 프로젝트 지원을 가치사슬 전반으로 확대하는 데 중점을 두며, 현재 EU 이사회·유럽의회와의 입법절차가 진행 중이다.
국내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MIMIT(기업·메이드인이탈리아부) 내 상설 미세전자 기술위원회가 정책 이행과 공급망 위험을 점검하며, 파비아 소재 Fondazione Chips-IT가 기술·과학 자문기관 역할을 수행한다. 재원으로는 총 32억 9,200만 유로 규모의 국가 미세전자 기금이 조성되어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배분될 예정이다(2025~2027년 각 3억 3,600만 유로, 2028년 3억 4,100만 유로, 2029년과 2030년 각 4억 7,500만 유로). 아울러 이후 예산법(legge di bilancio)을 통해 약 10억 유로가 추가로 배정되어 관련 재원이 확대됐다.
투자유치 측면에서는 SiC와 첨단 패키징을 핵심 전략분야로 설정해, ST의 카타니아 수직통합 시설(총 50억 유로, 정부 지원 약 20억 유로)과 Silicon Box의 노바라 패키징 시설(총 32억 유로, 정부 지원 최대 13억 유로)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IPCEI ME/CT에 참여해 PNRR·국가재원으로 약 10억 6,700만 유로를 배정했으며(MEMC FAB300 지원 약 1억 300만 유로 포함), EU Chips Joint Undertaking과 연계한 WBG 파일럿라인 구축에 국내 공동투자금 약 5,300만 유로를 배정해 카타니아를 CNR-IMM 주관의 SiC·GaN 파일럿라인 거점으로 육성 중이다. 설계·인력 측면에서는 2023년 설립된 Fondazione Chips-IT가 이탈리아 최초의 반도체 집적회로 설계 전문 국가기관으로서 중소 팹리스·스타트업의 사업화를 지원하고 있다.
시사점
이탈리아 반도체산업은 상류(실리콘 웨이퍼)와 전공정(전력·아날로그)에 역량이 편중되고 후공정·첨단 패키징은 구조적 공백을 보이는 비대칭적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대규모 투자와 EU Chips Act 2.0 연계 정책이 진행 중이나, ST 카타니아 SiC 캠퍼스와 Silicon Box 노바라 프로젝트 등 핵심 사업이 일정 지연 또는 조건부·미착공 단계에 있고, ST의 이탈리아 신규 산업계획(총 120억 유로) 역시 2026년 9월 기본협약 체결과 이사회 승인을 앞두고 있어 실제 신규 수요가 본격화되는 시점은 유동적이다. 또한 LFoundry의 급격한 가동 축소가 보여주듯 개별 거점의 부침에 따른 변동성도 상존한다.
시장 접근 관점에서 유의할 점은, 이탈리아 반도체 조달이 유통·대리점 중심이 아니라 발주처 직접 인증(AVL·qualification) 기반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부장·장비 분야 신규 진입은 개별 팹 단위의 기술 검증 절차를 통과해야 하며, 단기 성과보다 중장기 관점의 접근이 요구된다. 취급 품목과 참여 기업이 제한적이고 진입장벽이 높은 산업 특성상, 범용적 시장 확대보다는 특정 공정·품목에 특화된 정밀한 타깃팅이 현실적이다.
수요 흡수 구조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반도체 상당 부분이 이탈리아 내수보다 유럽 역내 제조업체와 글로벌 OEM 공급망을 통해 소비되므로, 우리 기업으로서는 이탈리아 단일 시장보다 유럽 반도체 공급망 전반의 흐름 속에서 접근 지점을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만 테스트·계측(프로브카드 등 테스트 인터페이스) 분야는 이탈리아가 상대적 강점을 보유하고 있어, 협력·조달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접근 가능성이 있는 영역으로 파악된다.
자료: STMicroelectronics·MEMC/GlobalWafers·Silicon Box 등 기업 홈페이지, EU 집행위원회·EUR-Lex, EU Chips Joint Undertaking, 이탈리아 MIMIT, 현지 언론(Il Sole 24 Ore 등), KOTRA 밀라노 무역관 자료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