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EU 내에서 점진적으로 확산되던 탈원전 기조는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독일은 같은 해 노후 원전 8기를 즉시 영구 폐쇄하고 나머지 원전도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결정하며 탈원전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이탈리아는 2011년 국민투표를 통해 신규 원전 도입 계획을 철회했으며, 리투아니아도 2012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비사기나스(Visaginas) 신규 원전 프로젝트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처럼 2010년대 EU에서는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면서 재생에너지 확대와 탈원전이 에너지 정책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스페인 역시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2019년, 2035년까지 자국 내 모든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탈원전 정책을 발표하였다.

에너지 공급 위기 이후 EU 내 원전 재평가 분위기 확산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촉발된 에너지 공급 위기와 2025년 스페인·포르투갈 대정전 사태 등을 계기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EU 내에서는 원전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EU는 2022년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원자력 발전을 EU 택소노미(EU Taxonomy)에 포함시키면서 원전 산업도 ESG 투자 및 녹색금융 조달 측면에서 유리한 여건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2023년 2월 프랑스의 주도로 원자력 동맹(Nuclear Alliance)이 출범하였으며, 2026년 현재 프랑스, 벨기에, 체코, 핀란드 등 14개국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원자력 동맹은 EU 차원의 원전 투자 확대, 핵연료 공급망 강화, 소형모듈원전(SMR)을 포함한 차세대 원전 개발 협력 등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물론 국가별 원전 정책의 방향은 EU가 아닌 개별 회원국의 권한에 속하지만, 원전에 대한 인식은 과거의 '위험하고 친환경적이지 않은 발전원'에서 최근에는 '에너지 안보와 안정적인 전력 공급,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현실적인 발전원'으로 점차 변화하는 추세다.


스페인은 탈원전 정책 유지

이 같은 EU 내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정부는 여전히 탈원전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2026년 현재 집권 중인 사회노동당(PSOE) 정부는 2019년 발표한 기존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내부에서는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제1야당인 국민당(PP)을 비롯해 Iberdrola, Endesa, Naturgy 등 주요 전력회사와 원전 소재 지방정부는 전력 공급 안정성 확보, 산업 경쟁력 유지, 전기요금 상승 억제, 지역 고용 보호 등을 이유로 원전 수명 연장과 탈원전 정책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 스페인 원자력 발전소별 가동 중단 예정 시점 >

원전명

가동중단 예정 시점

알마라스 1호기(Almaraz I)

2027년 11월

알마라스 2호기(Almaraz II)

2028년 10월

아스코 1호기(Ascó I)

2030년 10월

코프렌테스(Cofrentes)

2030년 11월

아스코 2호기(Ascó II)

2032년 9월

반데요스 2호기(Vandellós II)

2035년 2월

트리요(Trillo)

2035년 5월

[자료: 스페인 원자력산업협회(Foro Nuclear)]


특히 가장 먼저 폐쇄가 예정된 알마라스(Almaraz) 원전이 최근 논쟁의 중심에 있다. 전력회사들은 알마라스 원전의 운전 연장을 정부에 공식 요청하기로 합의했으며, 스페인 정부도 해당 요청이 접수될 경우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만 현재까지 2035년 탈원전 로드맵 자체를 변경하거나 철회하겠다는 공식 발표는 없는 상황이다.

스페인의 원전 운영 현황 및 시장 특징

스페인의 원전 사업은 민영화되어 있으며, 2026년 7월 기준 5개 부지에서 7기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원자로는 총 3개의 운영사(CNAT, ANAV, Iberdrola)가 단독 또는 합작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은 2025년 기준 스페인의 전체 전력 생산의 약 19%를 차지하며, 풍력에 이어 두 번째로 비중이 큰 발전원이다. 2020년 약 23%에서 4%p가량 하락하며 1위 자리는 풍력에 내주었지만, 여전히 스페인 전력 공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스페인의 에너지원 전력생산 비중 현황 >

발전방식

2020

2025

증감

풍력

22.2

21.6

-0.6%p

원전

23.0

19.0

-4.0%p

태양광

6.1

18.4

12.3%p

복합화력

15.8

16.8

1.0%p

수력

12.6

12.4

-0.2%p

열병합

11.1

5.7

-5.4%p

석탄

2.0

0.6

-1.4%p

기타

7.2

5.5

-1.7%p

[ 자료 : Red Eléctrica ]

< 스페인 내 가동중인 원전별 세부 정보>

원전명

운영사

지분구조

출력규모

(MW)

유형

핵연료 교체주기

가동년도

알마라스 1호

(Almaraz I)

Centrales Nucleares Almaraz-Trillo, AIE. (CNAT)

Iberdrola Generación Nuclear, S.A. (52.7%), ENDESA Generación, S.A. (36.0%), Naturgy Energy Group, S.A. (11.3%)

1,049.40

PWR

18개월

1983

알마라스 2호

(Almaraz II)

Centrales Nucleares Almaraz-Trillo, AIE. (CNAT)

Iberdrola Generación Nuclear, S.A. (52.7%), ENDESA Generación, S.A. (36.0%), Naturgy Energy Group, S.A. (11.3%)

1,044.50

PWR

18개월

1984

아스코 1호

(Ascó I)

Asociación Nuclear Ascó-Vandellós II, AIE. (ANAV)

Endesa Generación, S.A. (100%)

1,032.50

PWR

18개월

1984

아스코 2호

(Ascó II)

Asociación Nuclear Ascó-Vandellós II, AIE. (ANAV)

Endesa Generación, S.A. (85%), Iberdrola Generación Nuclear, S.A. (15%)

1,027.21

PWR

18개월

1986

코프렌테스

(Cofrentes)

Iberdrola Generación Nuclear, S.A.

Iberdrola Generación Nuclear, S.A. (100%)

1,092.02

BWR

18개월

1985

반데요스 2호

(Vandellós II)

Asociación Nuclear Ascó-Vandellós II, AIE. (ANAV)

Endesa Generación, S.A. (72%), Iberdrola Generación Nuclear, S.A. (28%)

1,087.14

PWR

24개월

1988

트리요

(Trillo)

Centrales Nucleares Almaraz-Trillo, AIE. (CNAT)

Iberdrola Generación Nuclear, S.A. (49%), Naturgy Energy Group, S.A. (34.5%), EDP HC Energía, S.A. (15.5%), Endesa Generación, S.A. (1%)

1,066.00

PWR

12개월

1988

[ 자료 : 스페인 환경·인구부(MITECO) 및 원자력안전위원회(CSN) 자료 종합 ]

2026년 7월 기준 스페인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총 7기로, 이 중 6기는 가압경수로(PWR) 방식이며 1기는 비등경수로(BWR) 방식이다. 한국 원전 산업 역시 가압경수로 중심으로 기술과 운영 경험을 축적해 왔다는 점에서, 스페인 원전 시장과의 기술 협력 여지가 적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스페인 원전의 지분구조를 보면 대부분의 원전이 Iberdrola, Naturgy, Endesa 등 소수의 대형 전력회사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기업이 스페인 원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업들과의 네트워크 구축 및 현지 협력관계 형성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스페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업운전 개시 시기가 가장 빠른 알마라스 1호기를 시작으로 2035년까지 원전을 순차적으로 가동 중단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신규 원전 도입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매우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최근 에너지 안보, 전력망 안정성, 탄소중립 등의 이슈와 맞물려 기존 원전의 가동 연장 필요성을 제기하는 의견도 적지 않아, 향후 원전 가동 중단 시점이 연기될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 의견 및 시사점

스페인 원자력 분야 엔지니어링 기업인 Nucleonova의 후안 안토니오 무뇨스 티라도(Juan Antonio Muñoz Tirado) CEO는 KOTRA 마드리드무역관과의 인터뷰에서 “스페인 원전 분야에서는 신규 원전 건설보다는 기존 원전의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영, 노후 부품 관리, 규제 대응, 방사성폐기물 관리 및 해체 준비를 중심으로 수요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가동 중인 스페인 원전이 모두 1980년대에 상업운전을 시작한 만큼, 향후 밸브, 펌프, 케이블, 계측제어 장비, HVAC 등 주요 부품 및 장비 교체, 안전 시스템 개선, 스페인 원자력안전위원회(CSN) 규제 대응을 위한 엔지니어링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또한 원전의 단계적 폐쇄에 대비해 방사성폐기물의 처리, 운송, 저장 및 해체 엔지니어링 수요도 중장기적으로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스페인 내 재생에너지 보급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고, 2025년 4월 28일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 이후 전력망 안정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원자력 발전과 재생에너지의 안정적인 병행을 위한 부하추종 운전, 전력망 조정 서비스 등의 솔루션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무뇨스 티라도 CEO는 향후 스페인에서 신규 원전 건설 프로젝트가 추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하면서도 기존 원전의 운영 연장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닌 만큼, 단계적 폐쇄와 가동연장이라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는 신규 원전 건설 프로젝트가 더 매력적으로 평가될 수 있어, 기존 원전의 운영·유지보수 수요가 중심인 스페인 시장은 공급망 확보 측면에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는 스페인 원전 운영사 입장에서는 핵심 부품 조달 및 예비품 확보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반대로 우수한 원전 기자재 공급 역량을 보유한 외국 기업에는 스페인 시장 진입을 위한 틈새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자료 : 스페인 원자력산업협회(Foro Nuclear), Red Eléctrica, 스페인 환경·인구부(MITECO), 스페인 원자력안전위원회(CSN), Nucleonova 인터뷰, KOTRA 마드리드무역관 자료 종합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