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용 교수, San Jose State University


사실 이 이야기가 꼭 실리콘밸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떠나 글로벌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인데 다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이 실수들이 더 빨리, 더 크게 드러난다. 이곳은 개인의 전문성만큼이나 커뮤니케이션, 오너십, 자기 방향성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이곳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며 자주 부딪히는 문제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자기검열 때문에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래도록 튀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져 왔다. 내 성과를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일조차 스스로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은 회의에서 말을 아끼고, 1:1에서도 필요한 이야기를 충분히 하지 못하며, 기회가 와도 먼저 손을 들지 못한다.


하지만 미국 회사에서 침묵이 반드시 겸손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에서 막혀 있는지, 어떤 기회를 찾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더 나쁜 경우에는 관심이 없거나 준비가 덜 되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특히 매니저와의 1:1은 단순한 업무 보고 시간이 아니다. 내가 조직 안에서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자기검열이 심하면 정작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부족하다고 오판하기도 하고, 반대로 정말 개선해야 할 커뮤니케이션이나 협업의 문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채 지나가기도 한다.


결국 커리어에서 중요한 것은 조용히 열심히 하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것이 중요한지, 다음에는 무엇을 더 해보고 싶은지를 꾸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일은 혼자 알아서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묵묵히 열심히 하면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인 적극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전문성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전문성은 중요하다. 실력 없이 커리어를 오래 이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특정 기술 하나를 깊게 안다고 해서 커리어가 영원히 안전해지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특히 AI가 빠르게 바꾸고 있는 지금은 더 그렇다. 오늘의 희소한 기술이 내일은 도구가 되고, 어제까지 전문가만 할 수 있던 일이 오늘은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어떤 기술을 아는가?”가 아니다. “그 기술로 어떤 문제를 풀 수 있는가?”, “그 문제를 풀었을 때 어떤 가치가 만들어지는가?”다. 회사는 기술 자체에 돈을 내지 않는다. 기술이 만들어내는 결과와 가치에 돈을 낸다.


여기서 오너십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오너십을 “내가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 정도로 이해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오너십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가 하는 일이 고객, 제품, 매출, 조직의 목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고, 그 가치가 실제로 만들어질 때까지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리더십 경험도 중요하다. 반드시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작은 프로젝트라도 사람을 설득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해관계자를 조율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기술을 넘어 문제 해결자로 성장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은 대개 특정 기술의 보유자가 아니라, 복잡한 문제를 끝까지 풀어내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꿈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한 나머지 자기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커리어 초반에는 좋은 학교, 좋은 회사, 높은 연봉, 유명한 타이틀 같은 마일스톤을 좇아도 괜찮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그런 목표들은 분명한 기준을 주고, 초반 커리어를 밀어붙이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어느 회사에 갈 것인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물어야 한다. “얼마를 받을 것인가?”보다 “나는 어떤 임팩트를 만들고 싶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기준을 따라 오래 달리다 보면,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안쪽에서는 공허함이 쌓일 수 있다.


특히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더 쉽게 남의 기준에 갇힌다. 비자, 언어, 문화, 네트워크 같은 현실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일단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안전한 선택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우리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있다. 40대에도, 50대에도, 심지어 그 이후에도 커리어는 계속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남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시간은 길지 않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을 알고, 내 페이스로 움직일 수 있다면 시간은 훨씬 넉넉해진다.


그래서 조금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국 다시 꿈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꿈은 대단한 사명 선언문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문장일 필요도 없다. 내가 어떤 문제에 오래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일할 때 에너지가 나는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때 스스로 납득이 되는지를 묻는 일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회사에 들어가 오래 버티는 일이 아니다. 자기검열을 넘어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전문성을 넘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며, 남의 기준을 넘어 나만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결국 커리어는 내가 어디서 시작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지의 문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남이 정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주 묻고, 말하고, 실험하면서 찾아야 한다. 나만의 꿈은 무엇인지 많이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어디에 살건 정말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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