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바꾼 소비 인식, 벨기에 가정에 냉방 수요 확산
벨기에는 연간 강수량이 많고 여름철 기온이 비교적 온화해 그간 냉방 설비가 필수 가전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반복되는 폭염과 건물 에너지 효율 개선 흐름, 화석연료 난방을 줄이려는 에너지 전환 정책이 맞물리면서 가정용 냉방 및 고효율 냉난방공조 수요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냉난방공조는 일반적으로 HVAC(Heating, Ventilation and Air Conditioning)로 불리며, 난방·환기·냉방을 포괄하는 건물 설비 분야다. 최근 유럽에서는 HVAC가 단순 실내 온도 조절 설비를 넘어 건물 에너지 효율, 실내 공기질, 화석연료 난방 감축을 동시에 달성하는 핵심 기술 영역으로 다뤄지고 있다.
벨기에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벨기에 가구의 내장형(붙박이형) 에어컨 보유율은 2018년 3%에서 2024년 10%로 상승했다. 6년 만에 3배 이상 늘어난 수치로, 냉방 설비가 낯설던 벨기에 가정에서도 에어컨이 점차 현실적인 선택지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동식 에어컨 보유율도 2024년 10%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내장형 에어컨 보유율이 플랜더스 13%, 왈로니아 7%, 브뤼셀 4%로 집계돼, 주거 형태와 설치 여건에 따라 지역별 보급 속도에도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수요 확산의 직접적 배경은 잦아진 폭염이다. 벨기에 왕립기상연구소(KMI)에 따르면 기준관측소인 우클(Ukkel)의 2025년 연평균 기온은 12.0ºC로 평년 11.0ºC보다 높았으며, 1833년 관측 이래 2014년과 함께 공동 4번째로 더운 해로 기록됐다. 2025년에는 공식 폭염도 두 차례 발생했다. 변화는 판매 수치에서도 확인된다. 벨기에 냉동·공조협회 프릭시스(Frixis)는 2025년 여름철 에어컨 판매가 2024년 같은 기간 대비 약 17% 증가했으며, 그 주요 원인으로 거듭되는 여름철 고온을 지목했다. 다이킨(Daikin) 벨기에도 자국 내 에어컨 판매가 지난 15년간 약 3배 증가했고, 2003년 유럽 대폭염 이후 에어컨이 가정에서 점차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중장기 전망도 비슷한 경향을 보여준다. 한 학술 연구는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적용할 경우 벨기에 주거용 건물의 냉방 에너지 수요가 2010년대 대비 2050년대에 약 39~65% 증가할 수 있다고 추정했고, 벨기에 경제 분석기관 에코노폴리스(Econopolis)도 가구 에어컨 보급률이 이탈리아 수준(50%)까지 오를 경우 연간 전력 수요가 최대 2.47 TWh 증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보급률 자체는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여전히 낮은 편이어서, 시장은 이미 포화 단계라기보다는 신규 설치 수요가 새로 형성되는 단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에어컨에서 고효율 냉난방공조로, 시장 인식 변화
벨기에 시장에서 눈여겨볼 흐름은 단순 냉방기보다 냉방과 난방을 함께 제공하는 고효율 제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지에서 흔히 'split airco'로 불리는 실내기·실외기 분리형 에어컨은 실제로는 여름에는 냉방, 겨울에는 보조 난방까지 가능한 냉난방 겸용 에어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으로는 외부 공기의 열을 활용하는 공기열 히트펌프(air-to-air heat pump) 냉난방기에 해당한다.
벨기에 유통망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전기자재·에너지 솔루션 유통기업 렉셀 벨기에(Rexel Belgium)는 LG의 분리형 공기열 히트펌프 제품군을 새로 취급하고 있으며, 설치업체를 대상으로 에어컨 셀렉터, 설치 가이드, 기술 지원, 냉동기술 시운전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벨기에 냉방 시장이 단순 제품 판매를 넘어 설치·시운전·사후관리 역량이 함께 요구되는 고효율 냉난방공조 시장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제조사들도 적극 대응하고 있다. 다이킨은 공기열 히트펌프 냉난방기의 냉방·난방 기능과 에너지 효율을 강조하며, 기존 난방 시스템과 히트펌프 난방을 함께 사용할 때의 비용 절감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온라인 시뮬레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히트펌프 전체 시장도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유럽히트펌프협회(EHPA)에 따르면 2025년 유럽 16개 조사 대상국의 주거용 히트펌프 판매량은 262만 대로, 2024년 238만 대보다 증가했다. 벨기에의 히트펌프 판매량도 전년 대비 7% 증가해 약 11만 1000대를 기록했다. EHPA의 2024~2025년 유럽 주요 국별 히트펌프 판매량 비교에서도 벨기에는 판매량이 증가한 국가군에 포함됐다. EHPA는 벨기에의 화석연료 난방 제한 정책과 신축 건물용 히트펌프 부가가치세 인하가 판매 회복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했다.
<2024~2025년 유럽 주요국별 히트펌프 판매량 비교>

[자료: EHPA]
이처럼 벨기에 냉방 시장은 단순한 여름철 에어컨 판매 증가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냉방 수요 확대, 화석연료 난방 축소, 고효율 히트펌프 보급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냉방·난방·환기·제어를 통합한 HVAC 솔루션 전반의 수요가 함께 형성되고 있다. 시장 성장과 함께 벨기에는 HVAC 연구개발 거점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다이킨은 겐트대학교 테크레인 사이언스파크에 1억 4000만 유로를 투자해 유럽 개발센터를 구축했으며, 2024년 말 완공된 이 시설은 지속가능한 난방·냉방 솔루션 개발을 위한 유럽 혁신 허브 역할을 담당한다.
탈(脫)가스·F-gas가 만드는 새 시장 기준
벨기에 냉난방공조 시장의 흐름은 정책·규제 환경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 우선 난방 연료 전환 정책이 전기 기반 설비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 플랜더스 정부는 2025년부터 신축 주거·비주거 건물에 대해 새 천연가스 연결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현지 업계도 이러한 규제 변화를 신축 건물 시장에서 히트펌프 수요를 견인하는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현지 냉난방·환기·공조 산업협회 C협회 담당자 P씨는 KOTRA 브뤼셀무역관과의 인터뷰에서 “플랜더스에서는 신축 건물에 더 이상 화석연료 기반 설비를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신규 건축 부문에서는 사실상 비화석연료 솔루션이 선택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왈로니아의 경우 신축 건물의 난방유 보일러 설치 제한이 중심이어서 지역별 정책 강도에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P씨는 플랜더스 정부가 현 임기 말까지 전기와 가스의 가격 격차를 낮추겠다고 밝힌 점을 언급하며, 가격 격차가 완화될 경우 히트펌프 투자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편 벨기에는 연방국가로 플랜더스, 왈로니아, 브뤼셀 수도 지역이 각각 에너지·건물 정책을 운영하므로, 시장 진입 시에는 지역별 규제와 보조금, 건물 기준을 구분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EHPA가 벨기에 히트펌프 판매 회복 요인으로 지목한 신축 건물용 VAT 부담 완화도 주택 연식, 신축·리노베이션 여부, 설치 방식에 따라 적용이 달라질 수 있어 실제 거래 구조별 확인이 필요하다.
또한 냉매 규제는 제품 자체의 시장 진입 조건을 좌우한다. EU는 2024년 개정 F-gas(불화온실가스) 규정을 통해 냉동·공조·히트펌프 부문의 불소계 온실가스 감축을 강화하고 있으며, 업계에서는 강화된 규정이 지구온난화지수가 낮은(저GWP) 대체 냉매 전환을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제조사들은 자연냉매·저GWP 냉매 적용 제품군을 확대 중이다. 트레인(Trane)은 2024년 2월 프로판 기반 냉매인 R290을 적용한 온수·난방용 공기열 히트펌프(air-to-water heat pump) 'LEAF'를 출시했고, 캐리어(Carrier)도 R290을 적용한 '아쿠아스냅(AquaSnap)' 제품군을 유럽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냉매 전환은 기술자 인증 요건과도 직결된다. EU 집행위원회는 2024년 9월 F-gas 규정 이행을 위한 시행령들을 채택하면서, 냉동·공조·히트펌프 장비 기술자 인증 요건을 새 규정에 맞춰 조정했다. 새 시행령은 기존 F-gas뿐 아니라 F-gas를 대체하는 냉매를 사용하는 장비까지 인증 범위에 포함하며, 탄화수소계 냉매, CO₂, 암모니아 등 자연냉매 관련 지식과 기술 요건도 반영한다. 이에 따라 유럽 HVAC 시장에서는 제품의 냉매 전환뿐 아니라 이를 안전하게 설치·유지 보수할 수 있는 인증 인력과 기술 지원 체계도 중요한 경쟁 조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시사점 및 전망
벨기에의 냉난방공조 시장은 기후 적응과 에너지 전환이 동시에 작용하는 분야다. 거듭되는 폭염은 냉방 수요를 확대하고, 화석연료 난방 축소 정책은 고효율 히트펌프와 냉난방 겸용 제품의 시장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 EU F-gas 규제 강화와 EU 건물 에너지 성능 지침(Energy Performance of Buildings Directive) 국내법 전환이 더해지면서 향후 시장은 단순 저가 제품보다 고효율, 저GWP 냉매, 스마트 제어, 설치 편의성을 갖춘 제품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지 업계가 보는 진입 조건도 명확하다. P씨는 비유럽계 공급기업이 벨기에 시장에 진입할 때 "제품 가격이 가장 중요한 변수"라면서도, 높은 SPF(계절성능계수), 자연냉매 적용, 태양광·배터리 연계 스마트 제어, 위생 온수 시스템과의 통합 가능성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설치업체별 기술 역량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공급기업이 충분한 기술 지원과 설치·유지보수 교육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P씨는 향후 EU 차원에서 강화될 ‘유럽산(Made in Europe)’ 관련 정책 흐름에도 사전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은 벨기에 시장을 단순 에어컨 수출 시장으로 보기보다, 냉방·난방·환기·제어가 결합된 고효율 HVAC 솔루션 시장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에어컨 완제품뿐 아니라 냉난방 겸용 공조기기, 공기열 히트펌프(air-to-air, air-to-water heat pump), 열교환기, 센서, 온도조절기, 스마트 제어장치, A/S 부품 등으로 기회 품목을 넓혀볼 수 있다. 진출 방식에서는 제품 판매와 함께 현지 인증, 기술 문서, 설치 교육, 부품 공급, 사후관리 체계를 패키지로 제시하는 전략이 효과적일 것이다.
다만 시장 진입 시 실무적으로 점검해야 할 부분도 있다. 벨기에의 주택 유형은 아파트, 연립주택, 오래된 건축물이 많아 실외기 설치 가능 여부와 건물 규정도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은 현지 건축 환경과 규제, 설치 관행을 충분히 파악한 뒤 초기 단계부터 현지 유통사 및 설치 파트너와 협력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자료: EU 집행위원회, Statbel, KMI, Frixis, Daikin Europe, EHPA, Econopolis Strategy, Flanders.be, Rexel Belgium, Trane Technologies, Carrier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