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모(Morris Koo) 대표, OVI Partners

7월 24일, 필자는 샌프란시스코 도그패치의 '더 미드웨이'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주최한 '샌프란시스코 AI 서밋' 현장이다. 무대 위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섰고, 객석과 패널석에는 미국 AI 기업들의 CEO, 오픈AI, 엔비디아, 앤트로픽, 브로드컴 이 앉았다. 우리 한국기업은 삼성전자 회장, SK 회장, 현대차그룹 회장, 네이버 의장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해 온 필자에게도 낯선 풍경이었다. 세계 AI 산업의 정점에 있는 기업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그것도 한국 정부가 주최한 행사에 모이는 장면은 흔한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지내 온 필자에게도 이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HBM 메모리와 반도체라는 공급망의 핵심 자원을 기반으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기업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AI 인프라 경쟁이 심화되면서 메모리 확보가 각 기업의 최우선 과제가 된 시대적 배경이, 이날의 참석자 명단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필자에게는 한미 기술 협력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AI 서밋 행사장 입구>

[자료: 기고자(구원모) 직접 촬영]


서밋보다 조용했지만, 어쩌면 더 중요했던 다음 날


진짜 이야기는 다음 날 이어졌다. 이번에는 벤처캐피털이 줄을 섰다. 7월 25일, 세콰이어캐피탈(Sequoia), 안드리슨 호로위츠(a16z), 제너럴캐털리스트, 코슬라벤처스, 라이트스피드, NEA — 애플, 엔비디아, 구글, 오픈AI의 초기 투자자들이자 합산 운용자산 3,130억 달러(약 450조 원)에 달하는 실리콘밸리 최상위 벤처캐피털 6곳이 한자리에 모였다. 운용자산 1,690조 원으로 세계 3대 연기금인 국민연금공단은 이 6곳과 각각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이들이 이렇게 한 방에 모이는 일은 드물다. 이날 모더레이터를 맡은 실리콘밸리 GFT벤처스의 음재훈 대표는 필자에게 이렇게 평했다. "이번에 참여한 VC들은 실리콘밸리의 대표 VC들이었습니다. 현지에서도 그들이 이렇게 모이는 자리는 흔치 않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연금의 자본과 한국 스타트업의 가능성과 기술력에 크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제부터 한국 자본과 스타트업들도 메인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발언의 결이 달라진 것이 인상적이다. a16z의 마틴 카사도는 "한국의 하드웨어·제조 역량이 미국의 소프트웨어·AI와 결합하면 양국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했고, 비노드 코슬라는 "한국은 인재 강국이며 한국 투자를 계속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은 오랜 안보동맹을 넘어 기술동맹, 혁신동맹, 스타트업동맹으로 협력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며 "다음 세대의 삼성, 현대, SK, 네이버를 함께 만들자"고 화답했다.


이틀을 종합하면 구도가 선명해진다. 첫날이 기술과 공급망의 동맹이었다면, 둘째 날은 자본의 동맹이었다. 한국 기관자본이 실리콘밸리 최상위 펀드로 들어가는 통로와, 실리콘밸리 자본이 한국 스타트업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이틀 사이에 함께 열린 것이다. 기술과 자본, 두 통로를 동시에 뚫은 것은 대단히 영리한 전략이다. 둘 중 하나만 막혀도 성장은 둔화된다.


해석 1. 선언의 단계는 끝났다, 지렛대는 한국 쪽에 있다


이번 서밋을 일회성 행사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확인한 참여 기업들의 행보는 그와 거리가 있었다. 엔비디아, 오픈AI, 앤트로픽, 브로드컴은 실체가 없는 자리에 최고경영자를 보내지 않는다. 이들이 움직인 이유는 명확하다. AI 인프라 경쟁의 병목이 메모리와 컴퓨팅 파워로 옮겨왔고, 그 공급의 열쇠를 한국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젠슨 황의 HBM 발언은 덕담이 아니라 공급망의 현실을 요약한 것이다. 메모리가 부족한 세계에서 그것은 곧 협상력이다.


해석 2. 'AI 테스트베드'는 AI 강국, 그 이상의 이야기다


서밋에서 반복된 키워드는 테스트베드였다. 대통령은 올해 말부터 5000만 국민이 참여하는 '모두의 AI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밝혔고, 최태원 회장은 국민 1인당 AI 에이전트 하나를 목표로 제시했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25년 전을 떠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앞세워 '인터넷 강국'을 만들던 시절이다. 그 베팅은 IT 강국이라는 지위로 돌아왔다. 지금 한국은 같은 공식을 AI에, 훨씬 큰 판돈으로 다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판의 의미는 인터넷 시절과 차원이 다르다. 프런티어 모델의 테스트, 전 국민 단위의 적용, 산업 현장으로의 확산, 그리고 로봇과 자율주행으로 대표되는 피지컬 AI의 구현까지 — 앞으로 AGI 시대로 가는 전체 사이클이 한 나라 안에서 돌아가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샘 알트먼의 말대로 세계가 '다음'을 보러 한국을 찾는다면, 각국은 한국을 레퍼런스 삼아 따라오게 된다. AI 없이는 국가의 생존을 논할 수 없는 시대에, 이는 산업 정책을 넘어선 국가 전략의 문제다. 특히 필자가 몸담아 온 피지컬 AI 영역에서 이 구도는 의미심장하다. 현대차그룹은 이날 자동차 제조사에서 피지컬 AI 솔루션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엔비디아·웨이모·딥마인드와의 협력을 공개했다. 세계 1위의 로봇밀도와 제조 역량을 가진 나라가 국가 단위 테스트베드까지 갖추면, 피지컬 AI의 실증 무대는 자연스럽게 한국이 된다.


해석 3. 다리는 놓였다, 그러나 다리는 건너야 다리다


이제 냉정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MOU는 통로를 열었을 뿐, 교통량을 만들지는 않는다. MOU는 말 그대로 협력의 가능성을 함께 찾아보자는 양해각서일 뿐이다. 실리콘밸리 자본이 한국 팀에 실제로 들어가려면 누군가 그 사이에서 딜을 발굴하고, 검증하고, 미국 시장 안착까지 동행해야 한다. 협약과 시장 안착 사이에는 여전히 계곡이 있다. 법인 설립이 아니라 첫 미국 고객, 통역이 아니라 미국식 세일즈를 하는 현지 팀이 그 계곡을 건너게 한다. 자본만 건너오는 투자는 실패한다. 세일즈와 현지 시장 진입(GTM)까지 함께 만드는 밸류애드(value-added) 투자가 이 통로의 실제 교통량을 결정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 기업들이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을 짚는다.


첫째, 국내 트랙션을 '테스트베드 검증'의 언어로 다시 써야 한다.


국가 단위 AI 확산이 현실화되면, 한국에서 쌓은 실적은 더 이상 '작은 내수 시장의 성과'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밀도 높은 AI 테스트베드에서의 검증'이 된다. 같은 사실도 어떤 언어로 정리하느냐에 따라 미국 투자자와 고객에게 전혀 다르게 읽힌다. 국내 레퍼런스를 미국 피치에 쓸 수 있는 형태 — 영어 데이터룸, 미국 기준의 지표(metrics) — 로 지금 정리해 두어야 한다.


둘째, 'Day 1부터 글로벌'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이미 성공의 공식은 나와 있다. 센드버드, 몰로코, 눔, 트웰브랩스 — 한국인 창업자가 처음부터 미국 시장을 겨냥해 키워 낸 기업들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뒤 미국 진출'이 아니라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설계'가 공식 내러티브가 되었다는 뜻이며, 이 방향의 정부 프로그램과 예산은 늘어날 것이다. 준비된 팀에게는 지원을 잡을 타이밍이다.


셋째, 자본을 전략의 일부로 삼으라는 원칙은 이제 국가 스케일로 확장되었다.


지난 기고에서 필자는 전략적 투자와 합작이 단발성 수주가 만들지 못하는 구조적 결속을 만든다고 썼다. 이번 국민연금과 실리콘밸리 6대 VC의 협약은 그 원칙이 기업 단위를 넘어 국가 단위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기업 입장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의 선택지가 넓어진 것이다. 실리콘밸리 자본을 단순한 투자 유치 대상이 아니라, 미국 시장의 문을 여는 전략적 파트너로 접근해야 한다.


넷째, 이 문이 양방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 스타트업들에게도 한국의 기관자본, 파트너를 찾는 대기업, 세계에서 가장 빠른 AI 수용 시장은 매력적인 기회다. 실제로 필자가 현장에서 만난 미국 투자자와 창업자들의 질문은 이미 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수십 년간 통했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수출 수주로 성장하던 공식은 끝났다. 이제 한국 기업에게 주어진 것은 한국과 미국 양쪽의 자본을 지렛대 삼아 현지에 직접 들어가, 미국 기업들과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하고 동시에 협력하며 성장할 수 있는 절대적 기회다. 미국 파트너 발굴, 공동 개발, 상호 투자, 크로스보더 팀 구성 같은 선택지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기업만이 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대통령은 연설을 금문교의 비유로 맺었다. 바다를 가로질러 도시와 세상을 연결하며 번영을 열었던 다리처럼, 한미 AI 생태계를 잇는 다리가 되자는 것이다. 필자가 이틀간 현장에서, 그리고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에게서 확인한 것은 그 다리의 상판이 실제로 놓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다리는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다리다. 지난 기고의 결론을 다시 빌리면, 옛 공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업은 이번에도 파도에 휩쓸릴 것이고, 지금 건너기를 선택한 기업은 다음 10년의 주역이 될 것이다. 서울과 샌프란시스코 사이, 다리는 이미 열려 있다.


※ 해당 원고는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정보로 KOTRA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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