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45년까지 주 내에서 판매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 등 무탄소 자원으로 충당하도록 정한 주법 SB 100(상원 법안 100호)을 시행하고 있다.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날씨와 계절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남는 전기를 저장해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저장 기술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지금까지 이 역할은 리튬이온전지가 주로 맡아왔는데, 수소를 함께 활용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한 미국 에너지 정책 전반에서 꾸준히 논의돼온 주제다. 이 주제와 관련해 캘리포니아주 에너지위원회(CEC)가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 중 하나인 RAND연구소에 의뢰해 작성한 보고서가 2026년 6월에 나오면서, 주정부와 연방정부 양쪽의 수소 정책 기조를 함께 짚어볼 필요가 생겼다.
캘리포니아주, 수소 투자에 신중 모드로 전환
CEC가 발표한 보고서 "Assessing the Role of Hydrogen in California's Decarbonizing Electric System"(CEC-500-2026-018)은, 캘리포니아주가 전기요금에 부과해 마련하는 연구개발 기금인 전력 프로그램 투자부담금(EPIC)의 다음 투자 주기를 결정할 때 참고할 자료로 작성됐다. 보고서의 결론은 비교적 명확하다. 수소는 하루 단위로 충전·방전하는 용도에서는 경쟁력이 낮지만(균등화발전비용 기준 MWh(메가와트시) 당 약 700달러로, 태양광·배터리 조합의 약 70달러보다 훨씬 높음), 여름에 만들어 겨울에 쓰는 식의 '계절저장' 용도에서는 배터리보다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전해 전해조, 수소 전소(全燒) 가스터빈, 지하 수소저장시설, 수소 파이프라인 등 4가지 핵심기술이 동시에 성숙해야 한다고 봤다.
<연중 시간대별 수소터빈·전해조 가동 전략 — 부하 비중, 태양광 가동률, 순부하(net load) 추이>

[자료: CEC, “Assessing the Role of Hydrogen in California’s Decarbonizing Electric System”(2026.6.), RAND 분석]
다만 보고서는 이들 기술의 상용화 준비 정도가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규모 자본투자는 일단 멈추고 탐색적인 수준의 연구 개발은 계속할 것을 제안했다. 캘리포니아에 필요한 수소 발전소 수도 현재 가스터빈 설비(200기 이상) 대비 10% 이하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핵심기술의 성숙도를 검증할 실증사업으로는 미국 유타주의 ACES-Intermountain 프로젝트를 지목했는데, 별도로 확인한 결과 이 사업 역시 당초 계획보다 일정이 늦춰진 것으로 나타났다. 2022~2023년 발표 당시에는 가동 개시(2025년)와 동시에 천연가스에 수소 30%를 섞을 계획이었으나, 운영사인 LA수도전력국에 따르면 현재는 천연가스만으로 가동 중이며 수소를 섞기 시작하는 시점은 2026년으로 늦춰졌다.
이러한 신중론은 이번 보고서 하나에 그치는 흐름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주는 2022년 AB 209호를 통해 청정수소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소 생산·저장·활용 실증사업에 재정 지원을 해왔는데, 이 프로그램의 개정 공모 역시 2026년 상반기로 미뤄진 상태다. 또한 CEC는 2022년 제정된 SB 1075호에 따라 격년으로 작성하는 통합에너지정책보고서(IEPR)에 수소 관련 평가를 의무적으로 포함해야 하는데, 2026년 4월 발행된 2025년판 IEPR에도 전력·교통 부문의 청정수소 확대 방안이 별도 항목으로 다뤄졌다. 즉 이번 CEC의 RAND 보고서는 일회성 분석이 아니라, 법정 주기에 따라 반복되는 검토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다만 캘리포니아주가 수소 분야 전반에서 손을 떼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CEC는 2026년 4월 수소충전소 등 교통 부문 인프라에는 4500만 달러 규모의 신규 보조금(HIPO, Hydrogen Infrastructure Project Opportunity)을 별도로 공고했다. 이번 보고서가 신중론을 펴는 대상은 '전력망용 대규모 투자'로 한정돼 있으며, 수소차·충전소 등 교통 부문 지원은 별개로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다. 주 차원의 수소 지원 정책이 분야별로 속도를 달리하며 재정비되는 국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방정부 수소 정책도 같은 방향
캘리포니아주 안에서 신중론이 나오는 사이,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수소 관련 지원이 줄어드는 흐름이 겹치고 있다. 연방정부는 2021년 인프라법(IIJA)을 통해 전국 7개 권역에 수소 생산·공급 거점을 조성하는 '수소허브' 사업에 약 70억 달러를 배정했다. 캘리포니아의 수소허브 컨소시엄인 ARCHES도 이 가운데 최대 12억 달러를 지원받기로 하고 2024년 출범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책 방향이 바뀌었다. 미 에너지부(DOE)는 2025년 10월 캘리포니아(ARCHES)와 태평양 연안 북서부(PNWH2) 등 서부 해안 2개 허브에 대한 연방 자금 약 22억 달러의 지원을 취소했고, ARCHES는 같은 해 11월 수소 허브 사업 전반을 일시 중단했다. 다만 이 2개 허브에 대한 자금 취소 결정 자체는 2026년 4월 기준 법적 다툼이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져, 최종 결과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반면 애팔래치아·걸프코스트 등 화석연료 산업 기반이 강한 지역의 허브들은 같은 시점 DOE가 의회에 제출한 자금 유지 목록에 대체로 포함된 것으로 보도됐다. 이 중 애팔래치아 허브(ARCH2)는 천연가스를 원료로 한 블루수소 생산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고, 걸프코스트 허브(HyVelocity)는 블루수소와 그린수소를 병행 추진하는 구조다. 반면 자금이 취소된 캘리포니아(ARCHES)·태평양 북서부(PNWH2) 허브는 재생에너지 전해조 기반의 그린수소 전용으로 설계돼 있어, 이번 자금 재편이 결과적으로 그린수소 중심 허브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친 모양새다.
아울러 2025년 7월 발효된 예산조정법(OBBBA)은 청정수소 생산세액공제(45V, 킬로그램당 최대 3달러)의 공사 착공 시한을 기존 2033년 1월 1일에서 2028년 1월 1일 이전으로 5년 앞당겼다(즉 2027년 12월 31일까지 착공해야 적용된다). 이는 CEC 보고서가 비용 절감 효과를 전제로 삼은 세액공제와 같은 조항으로, 보고서의 권고대로 실증 데이터부터 기다리는 사이 새 프로젝트가 이 시한을 넘길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울 수 있다.
캘리포니아주와 연방정부의 신호가 같은 방향, 즉 수소·전력 분야에 대한 신중론으로 모이고 있다는 점은 비교적 분명하다. 다만 그 속도와 강도에는 지역별 편차가 있으며, 천연가스 기반 수소(블루수소)와 전해조 기반 수소(그린수소) 사이에서도 정책적 우선순위가 갈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
이번 보고서가 핵심기술로 지목한 수전해 전해조와 수소 전소 가스터빈 분야에는 한국 기업들도 이미 진출해 있다. 국내 업계 보도에 따르면 두산에너빌리티는 자체 개발한 대형 가스터빈을 기반으로 50% 수소 혼소 기술을 확보했고 전소 기술도 개발 중이며, 한화임팩트는 80MW급 가스터빈으로 수소 100% 전소 실증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옛 플러그파워와의 합작법인이었던 SK 플러그 하이버스를 통해 PEM 전해조 설비 인증·생산을 추진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러한 미국의 흐름은 유럽 등 청정수소(그린·핑크수소 포함) 확대를 제도화하려는 여타 글로벌 시장 환경과는 결이 다른 지점이 있어 면밀한 비교가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도 재생에너지·원전·수소를 기술중립적으로 활용하는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를 추진하는 한편, 연내 수립 예정인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암모니아 혼소 비중을 줄이고 그린·핑크수소 비중을 확대할 것이라는 관측이 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이 관측대로 확정될 경우,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연방정부는 단기적으로 천연가스 기반(블루수소) 인프라의 안정성 확보에, 한국은 그린·핑크수소 생태계 조성에 각각 정책적 비중을 두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한국 기업이 지역별·기술별 시장 우선순위를 판단하는 데 참고할 요소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미국 시장에서 수소 전소 터빈이나 대형 전해조 사업을 검토하는 한국 기업이라면, 이번 보고서의 결론과 함께 다음 세 가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연방정부의 수소허브 지원이 지역별로 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만큼, 캘리포니아 외 지역에서의 사업 기회와 자금 조달 여건이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45V 세액공제의 착공 시한(2028년 1월 1일)을 고려해 신규 프로젝트의 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셋째, 글로벌 시장별 청정수소 인프라 성숙도와 사업 성격의 차이를 감안한 '투트랙(Two-Track) 전략'이 요구된다. 미국 시장에서는 AI 데이터센터발 수요에 힘입은 천연가스 발전(가스터빈) 사업과, 이와는 별개로 진행 속도가 더딘 블루수소 사업을 구분해 접근하되 당장은 전자의 매출 기회에 집중하는 한편, 국내·유럽 등 그린수소 육성 방향이 논의되고 있는 시장에서는 전해조 등 원천기술 실증과 레퍼런스 확보에 우선순위를 두는 포트폴리오 다변화가 유효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살펴볼 점은, 연료 종류를 가리지 않는 가스터빈·연소기 분야 기업이라도 미국 시장 전략이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내 가스터빈 대형 수주는 대부분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수소를 섞지 않는 순수 천연가스 발전 수요에서 나오고 있다. 즉 지금의 수주 호황은 가스터빈 사업의 성장이지, 수소 사업의 성장은 아니다. 이 수주가 실제 수소 관련 매출로 이어지려면, 보고서에서 언급한 전해조 등 수소 생산 인프라가 미국 내에 함께 갖춰져야 한다. 결국 가스터빈 사업 자체의 기회와 수소 관련 매출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구분해서 봐야 하며, 후자는 미국 수소 생산 생태계의 성숙 속도에 달려 있다.
아울러 최근 AI 데이터센터발 수요로 일반 가스터빈조차 공급이 부족해 대기 기간이 5~7년에 이르는 점도 변수다. 이 때문에 제조사들은 기존 천연가스 터빈 주문부터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며, 그만큼 상대적으로 시장 성숙도가 낮은 수소 전소 터빈의 양산·실증 일정은 뒤로 밀릴 수 있다. 결국 한국 기업으로서는 이러한 미국 정책·공급망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살피며 시장별 접근 속도와 우선순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자료: California Energy Commission(CEC), RAND Corporation, U.S. Department of Energy, E&E News(POLITICO), Canary Media, Clean Energy Group, Clean Air Task Force(CATF), Fuel Cells Works, Los Angeles Department of Water and Power, 두산에너빌리티·한화임팩트·SK이노베이션 등 국내 업계 보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자료 종합